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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소파에 앉아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문득 채널을 멈춘 경험,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화면 가득 펼쳐진 뉴질랜드의 풍경이 너무 낯설어서였습니다. 연기를 내뿜는 화산 옆에 빙하가 있고, 그 아래로 사막처럼 황량한 평원이 이어졌습니다. 그때는 그냥 예쁜 풍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자료를 다시 찾아보니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화산지형이 만들어낸 땅, 통가리로 국립공원
뉴질랜드 북섬에는 성격이 전혀 다른 세 개의 화산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통가리로 산, 나우루호에 화산, 그리고 북섬 최고봉인 루아페후 산입니다. 이 세 화산이 품고 있는 통가리로 국립공원은 1990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세계복합유산이란 자연 가치와 문화 가치를 동시에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된 지역을 뜻합니다. 자연유산이나 문화유산 중 하나만 해당하는 사례가 대부분인데,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뭅니다.
제가 소방 업무를 하면서 자연재난 관련 교육을 자주 접하는데, 나우루호에 화산을 보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거의 매년 분화를 반복하고, 1954년에는 실제로 용암이 흘러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루아페후 산도 최근 소규모 분화로 산 전체가 화산재를 뒤집어쓴 상태라고 합니다. 현장에서 산불이나 수해를 경험할 때 자연의 힘이 얼마나 큰지 느끼곤 하는데, 활화산 앞에서는 그 감각이 또 다른 차원으로 다가왔습니다.
화산지형의 또 다른 단면은 화이트 아일랜드에서 볼 수 있습니다. 1826년 이후 크고 작은 분화가 35차례나 있었고, 섬 전체에서 유황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곳의 분화구 호수는 수온이 최고 80도까지 오르는데, 수심과 수온의 변화가 분화 시기를 예측하는 중요한 척도로 활용됩니다. 화이트 아일랜드가 속한 타우포 화산대(Taupo Volcanic Zone)는 통가리로 국립공원에서 태평양 해저까지 길게 뻗은 화산 활동 지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섬 전체가 사실은 거대한 해저 화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땅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만들었습니다.
뉴질랜드 화산지형의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나우루호에 화산: 원추형 성층화산, 거의 매년 분화 반복
- 루아페후 산: 북섬 최고봉(해발 약 2,797m), 화산재로 주변 사막화
- 화이트 아일랜드: 타우포 화산대 소속, 분화구 호수 수온 최고 80도
- 통가리로 국립공원: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 등재(1990년)
빙하생태계가 조각한 남섬의 얼굴
북섬이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땅이라면, 남섬은 전혀 다른 힘이 지형을 빚었습니다. 두 개의 지각판이 충돌하며 솟아오른 서던 알프스 산맥입니다. 17개의 3,000m급 봉우리가 이어진 이 산맥의 주봉이 바로 마운트 쿡, 해발 3,764m입니다. 마오리어로는 아오라키, '구름을 뚫고 나온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운트 쿡과 태즈먼 산 사이에는 태즈먼 빙하(Tasman Glacier)가 걸쳐 있습니다. 길이 28km, 너비 2km에 달하는 이 빙하는 남극을 제외한 남반구 최장 빙하입니다. 직접 영상으로 봤을 때, 떨어져 나온 빙하 조각 하나가 고층 건물 높이와 맞먹는다는 설명을 듣고 규모가 머릿속에 잘 안 잡혔습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태즈먼 빙하의 면적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자료를 보고,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습니다.
빙하침식(glacial erosion)은 빙하가 이동하면서 지표를 깎아 계곡과 지형을 만드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마운트 쿡 국립공원의 퇴적암 지층은 비교적 무른 편이라 빙하가 가파르게 암석을 깎아내리며 독특한 협곡을 형성했습니다. 피오르랜드에서는 이 침식 작용이 U자형 계곡과 웅장한 폭포를 만들어냈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높이를 자랑하는 서덜랜드 폭포가 그 결과물인데, 낙차가 무려 580m에 달합니다. 1986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피오르랜드 국립공원이 이 지형 위에 자리합니다.
빙하가 사라진 자리에 바닷물이 들어와 생긴 좁고 긴 만을 피오르(fjord)라고 합니다. 뉴질랜드 남섬 서쪽 해안에 형성된 이 피오르들은 빙하시대의 산물이자, 지금도 살아있는 생태계의 거점입니다. 지구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추세가 지속될 경우 남반구 산악 빙하의 상당 부분이 금세기 안에 소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출처: IPCC). 태즈먼 빙하도 이 예측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종 다양성의 시계를 되감는 뉴질랜드 생태계
뉴질랜드가 생물 다양성의 보고로 주목받는 이유는 지리적 고립에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대륙인 호주와도 1,600km 이상 떨어져 있고, 포유류가 대륙에서 분화하기 이전에 곤드와나 대륙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포유류 포식자가 없는 환경이 수천만 년간 유지됐습니다. 그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진작에 사라진 생물들이 이곳에서만 살아남았습니다.
투아타라(Tuatara)가 대표적입니다. 공룡 시대부터 현재까지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아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파충류입니다. 100년 이상 장수하며, 포유류 포식자가 없는 환경이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날지 못하는 새들이 유독 많은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천적이 없으니 날아서 도망칠 필요가 없었고, 그 결과 비행 능력 자체가 퇴화했습니다. 타카헤처럼 1930년에 멸종 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재발견된 새도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딸과 동물도감을 보다가 "왜 어떤 동물은 없어졌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냥 멸종했다고 얼버무렸는데, 모아 이야기를 다시 접하고 나서야 그 질문의 무게를 제대로 느꼈습니다. 8천만 년 동안 살아온 모아가 마오리족이 정착한 후 불과 수백 년 만에 자취를 감췄고, 17세기 이후 유럽인의 정착과 함께 개·쥐·고양이 같은 외래 포식자가 유입되면서 멸종 속도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생물다양성 협약(CBD) 사무국 자료에 따르면 섬 생태계는 외래종 유입에 특히 취약하며, 전 세계 멸종 사례의 절반 이상이 섬에서 발생한 것으로 집계됩니다(출처: 생물다양성협약 사무국). 뉴질랜드 캠벨 섬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1807년 선박을 통해 유입된 들쥐가 50만 마리까지 불어나 토종 새와 식생을 초토화했고, 2001년 헬리콥터 다섯 대가 120톤의 미끼를 섬 전역에 살포하는 200만 달러짜리 박멸 작전을 펼쳐야 했습니다. 산불 대응 훈련 시나리오를 만들면서 생태계 회복 사례를 찾아본 적이 있는데, 캠벨 섬의 이 작전은 제 경험상 가장 충격적인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한 번 무너진 생태계를 원상 복구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훼손의 속도에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크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뉴질랜드의 자연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연 위에 군림해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화산 폭발과 빙하의 이동은 수천만 년 동안 쌓인 자연의 질서이고, 인간이 개입한 천 년은 그 질서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편리함과 소비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태즈먼 빙하가 줄어드는 속도, 캠벨 섬에서 박멸 작전에 쓰인 200만 달러, 그리고 딸의 질문이 자꾸 떠오릅니다. 자연 보전은 어떤 동물 몇 종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살아갈 땅을 지키는 문제라는 것, 뉴질랜드가 보여주는 교훈은 결국 그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