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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고래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저도 처음엔 그 말이 과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적 TV에서 범고래가 새끼 고래를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장면을 보고 한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최근 범고래 연구들을 접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절감했습니다.

    범고래 사진
    범고래 사진

    무리마다 다른 말을 쓴다 — 범고래의 방언

    범고래가 무리마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냥 고래 소리려니 했는데, 알고 보니 북쪽 무리와 남쪽 무리의 음파 스펙트럼을 비교하면 서로 확연히 다른 패턴이 나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음파 스펙트럼이란 소리를 주파수별로 분해해 시각화한 그래프로, 쉽게 말해 소리의 '지문' 같은 것입니다. 같은 캐나다 해역에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패턴의 소리를 내는 무리가 발견됐는데, 이 무리는 가끔씩만 나타난다 하여 '단기 체류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단기 체류자들은 물고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다사자 같은 포유류만 사냥한다는 점에서, 같은 종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완전히 다른 생활 방식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접하면서 인간 사회의 지역 방언이 떠올랐습니다. 경상도 말과 전라도 말이 다르듯, 범고래도 무리마다 고유한 소리 레퍼토리를 공유하고 그 소리로 자기 무리 구성원을 찾습니다. 이를 연구하는 방식도 인상적인데, 과학자들은 수중청음기(하이드로폰)를 활용합니다. 하이드로폰이란 물속에서 음파를 포착하는 수중 마이크로, 인간의 귀로는 듣기 어려운 초음파 대역까지 기록할 수 있는 장비입니다. 1970년대 초부터 캐나다 밴쿠버 섬 근처에서 이 장비로 범고래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고, 그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범고래는 한 종이 아닐 수 있다 — 종분화의 증거

    범고래가 단일 종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DNA 분석 결과를 보고 나서 그 인식을 완전히 바꿔야 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DNA 샘플을 분석한 결과, 문화가 다른 범고래 집단 사이의 이종교배(유전적으로 다른 개체들 사이의 번식)가 중단된 시점이 인간의 현생인류 분화보다 훨씬 앞선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여기서 이종교배 중단이란 두 집단이 같은 바다에 살면서도 서로 짝짓기를 하지 않게 된 상태를 말하며,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별개의 종으로 분화하게 됩니다. 인간의 경우 약 20만 년 전에 현생인류 조상으로부터 갈라졌는데, 범고래는 이보다 훨씬 이른 70만 년 전부터 포유류를 잡아먹는 북아메리카 계통이 먼저 분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후 남극 개체군이 여러 무리로 갈라지고, 또 다른 지역 개체들이 계속해서 분화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현재 범고래는 최소 4종류로 분류될 수 있으며, 외형적으로도 크기, 체색, 등지느러미 모양, 안장 무늬, 눈 주변의 흰 점 크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출처: NOAA 수산청). 특히 남극에는 이 중 세 종류가 나란히 서식하는데, 이들이 먹이 경쟁을 피하는 방식이 제게는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물범을 전담하는 무리, 밍크고래를 노리는 덩치 큰 무리, 펭귄을 민첩하게 쫓는 소형 무리가 같은 바다에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태적 지위의 분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유빙형 범고래: 삐죽한 지느러미와 노란빛 체색, 물범 전문 사냥
    • 남극 A타입 범고래: 몸길이 9m에 달하는 대형종, 밍크고래 포식
    • 소형 민첩형 범고래: 크기는 작지만 속도가 빠르고 펭귄 사냥에 특화
    • 물고기 포식형 범고래: 청어·연어 등 어류 중심 식단

    살인고래에서 이타적 동물로 — 스턴피 이야기

    범고래의 학명 오르키누스 오르카(Orcinus orca)는 라틴어로 '죽음의 영역에 사는 고래'를 뜻합니다. 로마 시대 작가 플리니우스도 혐오스러운 암살자라고 묘사했을 만큼, 범고래는 수천 년간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연구들을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스턴피라는 범고래 이야기였습니다.

    스턴피는 지느러미가 손상되어 헤엄치는 데 구조적 문제가 있는 암컷 범고래입니다. 수면에서는 잘린 지느러미만 보이지만, 수중에서 관찰하면 꼬리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어 같은 거리를 헤엄치는 데 다른 범고래보다 에너지를 훨씬 더 소모합니다. 그렇다 보니 혼자서는 사냥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무리의 다른 범고래들이 고등어를 잡은 뒤 통째로 삼키는 대신 반으로 잘라 스턴피 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의도적인 먹이 나누기인지 우연인지 과학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스턴피가 1996년 처음 발견된 이후 어미를 잃고 무리를 네 번이나 옮겼음에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설득력 있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무리도 스턴피를 내쫓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핵심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범고래의 뇌에는 방추세포(Von Economo Neuron)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방추세포란 공감, 사회적 인지, 감정 처리에 관여하는 특수 신경 세포로, 인간과 일부 대형 유인원, 고래류에서만 발견되는 세포입니다(출처: 미국 국립생물공학정보센터 NCBI). 이 세포의 존재가 범고래의 이타적 행동을 뒷받침하는 신경생물학적 근거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먼저 망가뜨렸다 — 포획 역사와 보존의 과제

    1964년 처음 수족관에 갇힌 모비 돌(Moby Doll)이 87일 만에 죽었을 때, 과학자들이 느꼈을 것은 연구 대상을 잃은 아쉬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범고래 연구의 문을 열었고, 대중의 관심이 쏟아지면서 1960년대 초부터 수족관 산업을 위한 대규모 포획이 시작됐습니다.

    사냥꾼들은 배와 헬리콥터, 폭약까지 동원해 범고래 무리를 특정 구역으로 몰아붙이고 새끼들을 어미로부터 분리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포획을 단순히 시대의 무지로 치부하는 시각도 있는데, 범고래가 얼마나 강한 모계 유대를 갖는 동물인지를 지금의 연구 결과로 대입해 보면 그건 단순한 동물 포획이 아니라 사실상 가족 해체에 가까웠습니다.

    1976년 법적으로 포획이 금지되었지만, 워싱턴주 남부 개체군은 현재 84마리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배설물 탐지견을 활용해 범고래 분변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개체군 건강을 모니터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분변 샘플 하나에서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 영양 상태, 임신 여부, 오염물질 농도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혈액 채취 없이 비침습적으로 건강 정보를 얻는 방법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비침습적이란 대상 동물의 신체에 직접 접촉하거나 채혈하지 않고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범고래를 이해하게 된 과정 자체가 범고래에게 큰 희생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제게 단순한 씁쓸함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다가옵니다.

    범고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살인고래'에서 '사회적 포유류'로 바뀌는 데 반세기가 걸렸습니다. 그 변화는 과학 덕분이기도 하지만, 먼저 무리하게 포획하고 나중에 연구한 인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개체군 회복을 위한 먹이 환경 보전, 오염 물질 감소, 고래 관람선 운항 규제 같은 실질적인 조치들입니다. 범고래가 무리 내 장애 개체를 포기하지 않는 동물이라면, 우리가 그 무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 - BBC / National Geographic 범고래 다큐멘터리 자막 스크립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