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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뱃은 최대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통통하고 느긋해 보이는 그 모습으로 우사인 볼트와 맞먹는 순간 속도를 낼 수 있다니요. 영상을 보기 전까지 저는 웜뱃을 그냥 '귀여운 호주 동물'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오랜 진화가 빚어낸 생존 전문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모습에 속지 마세요 — 웜뱃의 생존전략
웜뱃을 처음 동물원에서 봤을 때, 하루 종일 늘어져 있는 모습에 '정말 게으른 동물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 완전한 오해였습니다. 웜뱃은 야행성 동물입니다. 여기서 야행성이란 낮 동안은 굴 속에서 체온과 에너지를 보존하고, 밤이 되면 활발하게 활동하는 생태 패턴을 말합니다. 제가 동물원에서 본 낮의 웜뱃은 그냥 정상적인 수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웜뱃의 생존전략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엉덩이에 있는 연골판입니다. 두께가 약 2.5cm에 달하는 이 연골판은 골반 전체를 덮고 있어 포식자가 굴 안에서 웜뱃을 끌어내려할 때 사실상 방패 역할을 합니다. 태즈메이니아데빌조차 이 연골판을 뚫지 못한다고 하니, 귀여운 외모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방어력입니다.
또한 웜뱃은 느린 신진대사를 갖고 있습니다. 신진대사란 몸이 음식물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속도를 말하는데, 웜뱃은 한 끼 식사를 소화하는 데 최대 2주가 걸립니다. 이 덕분에 산불이나 포식자로 인해 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며칠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습니다. 느린 것이 약점이 아니라 생존 도구가 되는 셈입니다.
- 야행성: 낮엔 굴에서 휴식, 밤에 하루 3~8시간 먹이 활동
- 골반 연골판: 두께 약 2.5cm, 포식자 방어용 천연 방패
- 느린 신진대사: 소화에 최대 2주, 굴에 고립되어도 버팀
- 순간 속도: 최대 시속 40km, 최대 1분간 유지 가능
이빨과 똥이 알려주는 수렴진화의 힘
웜뱃과 비버는 전혀 다른 계통의 동물입니다. 웜뱃은 유대류, 비버는 설치류입니다. 그런데 두 동물 모두 평생 자라는 이빨, 즉 지속성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지속성장치란 딱딱한 식물을 씹어 마모되는 속도만큼 이빨이 계속 자라나는 구조를 말합니다. 진화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두 동물이 비슷한 환경적 압박에서 같은 해결책을 찾아낸 것인데, 이를 수렴진화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했지만 비슷한 문제를 풀다 보니 비슷한 답에 도달한 것입니다.
제가 영상을 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건 웜뱃의 배설물이었습니다. 웜뱃의 분변은 전 동물계에서 유일하게 정육면체 형태입니다. 하루에 최대 100개의 큐브형 배설물을 만들어내는데, 이걸 쌓아서 영역 표시에 활용합니다. 둥근 배설물은 경사면에서 굴러 흩어지지만 네모난 배설물은 제자리에 쌓이기 때문에 표지 효과가 훨씬 오래 유지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메커니즘이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대장의 마지막 구간에서만 배설물이 굳는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어떻게 원형이 아닌 정육면체가 만들어지는지는 여전히 연구 중입니다(출처: Nature). 자연이 먼저 해결한 문제를 인간이 뒤늦게 따라 배우려 하는 상황이 묘하게 재미있었습니다.
산불 속 영웅? 웜뱃 굴의 진짜 이야기
2019~2020년 호주 산불 당시, "웜뱃이 다른 동물들을 굴로 불러들여 함께 피신시켰다"는 이야기가 SNS에서 크게 퍼졌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통해 실제 상황을 알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사실에 가까운 설명은 이렇습니다. 웜뱃 굴은 길이 최대 20미터, 출입구가 15개 이상인 거대한 지하 네트워크입니다. 웜뱃은 의도적으로 다른 동물을 초대한 게 아니라, 그냥 굴이 너무 넓어서 여러 동물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버린 것에 가깝습니다. 웜뱃 입장에서는 불청객이 들어온 셈이죠.
하지만 저는 이 설명이 웜뱃의 가치를 낮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의 생물이 만든 구조물이 수십 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오히려 감동적인 미담으로 포장하기보다 실제 생태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편이 웜뱃이라는 동물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팩트를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꼈던 부분이었습니다.
웜뱃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굴파기 유대류입니다. 강력한 앞발 발톱으로 단단한 땅도 뚫어내며, 한 굴에서 평생 거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마리가 공간이 넉넉할 경우 같은 굴을 공유하기도 하며, 이 굴은 웜뱃 외에도 수많은 소형 동물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보전현황 — 귀엽다고 안전한 건 아닙니다
웜뱃에는 세 종이 있습니다. 일반 웜뱃, 북부 털코 웜뱃, 남부 털코 웜뱃입니다. 이 중 일반 웜뱃은 호주 동남부와 태즈메이니아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두 종입니다.
북부 털코 웜뱃은 현재 IUCN(국제자연보전연맹) 적색목록에서 '위급' 등급으로 분류됩니다. 위급이란 야생에서 멸종될 위험이 극히 높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숙한 개체가 퀸즐랜드 내 단 하나의 서식지에 80마리 남짓 남아 있습니다(출처: IUCN Red List). 남부 털코 웜뱃은 '준위협' 상태로 북부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여기서 번식 속도가 보전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웜뱃은 한 번에 한 마리의 조이, 즉 새끼만 낳습니다. 새끼는 육아낭에서 약 6개월을 보내고, 완전히 독립하기까지 약 20개월이 걸립니다. 어미 웜뱃 한 마리가 다음 새끼를 낳으려면 약 2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개체수가 한 번 줄어들면 회복 자체가 매우 느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제 경험상, 동물 콘텐츠를 볼 때 귀엽거나 재미있는 특징에만 집중하다 보면 보전 문제를 흘려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웜뱃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드킬, 서식지 파괴, 외래종 유입 같은 현실적인 위협까지 함께 기억해야 웜뱃을 진짜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웜뱃 똥은 왜 네모난 건가요?
A. 대장의 마지막 구간에서 배설물이 굳는 과정에서 정육면체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습니다. 다만 정확한 형성 메커니즘은 아직 연구 중입니다. 웜뱃은 이 네모난 배설물을 쌓아서 영역 표시에 활용하는데, 굴러떨어지지 않아 표지 효과가 오래 유지됩니다.
Q. 웜뱃은 정말 산불 때 다른 동물을 구해준 건가요?
A. 의도적으로 구해준 것은 아닙니다. 웜뱃이 만든 굴이 길이 최대 20미터, 출입구가 15개 이상인 넓은 공간이다 보니 다른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피신해 들어온 것에 가깝습니다. 웜뱃이 불러들인 게 아니라 다른 동물들이 무단으로 들어온 셈입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많은 생명을 살린 건 사실입니다.
Q. 웜뱃은 왜 멸종위기 동물인가요?
A. 세 종 중 북부 털코 웜뱃이 위급 단계로 가장 위험합니다. 서식지가 퀸즐랜드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성숙 개체가 80마리 남짓에 불과합니다. 번식 주기가 약 2년으로 길어 개체수 회복이 매우 더딘 데다 로드킬, 서식지 파괴, 외래종 유입 같은 위협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Q. 웜뱃이 비버랑 비슷한 이빨을 가진 이유가 뭔가요?
A. 수렴진화 때문입니다. 두 동물은 계통적으로 전혀 다르지만, 딱딱한 식물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공통된 환경적 압박 속에서 둘 다 평생 자라는 이빨이라는 같은 해결책에 도달했습니다. 진화는 혈통이 아니라 환경이 같으면 비슷한 답을 만들어낸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결론
웜뱃 영상을 다 보고 나서 제가 느낀 건 딱 하나였습니다. 겉모습으로 동물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 통통하고 느릿해 보이는 웜뱃이 사실은 연골 방패를 장착한 굴착 전문가이고, 네모난 배설물을 하루 100개씩 만드는 생물학의 수수께끼이며, 생태계 전체에 피난처를 제공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표면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웜뱃이 궁금하다면 단순히 귀여운 사진을 찾아보는 데서 끝내지 말고, IUCN 적색목록에서 털코 웜뱃의 보전 현황을 한 번이라도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지키고 싶어지는 게 동물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