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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지킨다는 게 과거에 집착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카프카스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전통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잊혀진 사람들의 배경
카프카스(Caucasus) 산맥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1,000km 이상 이어지는 거대한 자연 장벽입니다. 여기서 카프카스 산맥이란 유럽, 중동, 러시아의 경계를 동시에 이루는 지리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족이 이 산맥을 따라 이동하고 정착해 온 곳입니다.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소수민족은 약 150여 개로 추정됩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남부와 카프카스 북부 사이에 자리한 다게스탄(Dagestan) 공화국에는 38개 종족, 약 250만 명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 38개의 언어가 사용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인구 250만 명이면 우리나라 부산 정도의 규모인데,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언어가 살아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다게스탄에는 로마 시대의 목욕탕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0세기 요새 데르벤트(Derbent) 성이 남아 있습니다. 에스노링귀스틱 다양성(ethnolinguistic diversity), 즉 한 지역 안에 서로 다른 언어와 민족 정체성이 공존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보면, 다게스탄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입니다. 이 지표는 한 지역의 언어적·민족적 복잡성을 수치화한 것으로, 높을수록 다양한 민족이 공존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예전에 산골 마을을 방문했을 때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과 사투리도 다르고, 제사 음식도 다르고, 심지어 밭을 가는 방향도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시골 풍습'이라고 가볍게 넘겼는데, 알고 보니 그게 수백 년 동안 그 지역 사람들이 살아남는 방식이었습니다. 카프카스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양털 하나에 담긴 전통문화의 의미
이 지역 소수민족들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일상을 봐야 합니다. 아바르족(Avar) 여인들이 함께 만드는 부르카(Burka)는 천연 양털로 만든 전통 의상입니다. 양털을 손으로 뜯고, 활처럼 생긴 채로 풀어낸 뒤, 넓은 천에 펼쳐 물을 뿌리고 여럿이 함께 굴려서 완성합니다. 단순히 옷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웃과 호흡을 맞추고 몸으로 함께 눌러가며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타바사란족(Tabasaran) 여인들은 양털 카펫을 짜는데, 카펫 하나를 완성하는 데 약 3주가 걸립니다. 이들의 카펫은 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무형문화유산이란 물건이나 건물처럼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지식·의례·공연처럼 사람 몸과 기억 속에 살아있는 문화를 말합니다. 유네스코는 이런 문화들이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 목록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출처: 유네스코).
타바사란족의 전통 음식 다부가(Dabuga)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선한 우유를 끓여 산(酸, 요구르트 일종)을 만들고, 여기에 쌀과 허브 가루를 넣어 오래 끓이는 방식입니다. 재료도, 도구도 단순한데 만드는 과정이 정성스러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 같았습니다. 빵을 구울 때 쓰는 탄디르(tandir)는 우리나라 전통 아궁이와 구조가 닮아서 묘하게 친숙하기도 했습니다. 탄디르란 땅속이나 벽에 내장된 원통형 점토 화덕으로,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빵을 굽는 데 사용해 온 전통 조리 기구입니다.
카프카스 소수민족들의 전통문화가 지금도 유지되는 데는 공동체적인 방식이 큰 역할을 합니다. 타바사란 마을에서는 탄디르 하나를 이웃이 함께 씁니다. 각자 빵을 구우러 모이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런 문화가 단순히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할 때보다, 이런 방식이 훨씬 단단하게 사람을 붙잡아 준다는 걸 산골 마을에서 느꼈습니다.
카프카스 소수민족들의 문화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부르카(Burka): 아바르족의 천연 양털 전통 의상. 여럿이 함께 굴려 만드는 공동 작업 방식
- 수제 카펫: 타바사란족 여인들이 약 3주에 걸쳐 직접 짜는 전통 공예품
- 탄디르 공동 사용: 마을 사람들이 화덕 하나를 함께 쓰며 관계를 유지하는 생활 방식
- 레즈긴카(Lezginka): 레즈긴족에서 시작해 카프카스 전체로 퍼진 전통 춤. 집단적 일체감의 상징
강제이주의 상처와 공존의 현실적 가능성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카프카스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보기 전까지, 저는 그들이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전통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소련 정권이 자행한 강제이주(forced deportation) 정책이 있었습니다.
강제이주란 특정 민족 또는 집단을 고향에서 강제로 떼어내 먼 지역으로 이송하는 정책으로, 소련은 체첸족·발카르족(Balkar) 등 민족 정체성이 강한 소수민족들에게 이를 반복적으로 자행했습니다. 발카르족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1944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땅에서 13년을 보낸 뒤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구시(Ingushetia) 지역 난민촌 알리유르트에서는 19년째 창고를 개조해 사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고향 땅이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뒤라,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단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전 세계적으로 국내 실향민(IDP, Internally Displaced Persons)은 2023년 기준 약 7,150만 명에 달합니다(출처: UNHCR). IDP란 전쟁이나 박해, 재난으로 인해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자국 내에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체첸(Chechnya)의 상황은 더 직접적입니다. 1994년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체첸은 무차별 폭격을 받았고, 3년간의 전쟁으로 민간인 수만 명이 희생됐습니다. 체첸은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고 중동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송유관이 통과하는 지역이라, 러시아 입장에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고향집 폐허 앞에 서 있는 발카르족 따이르 씨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제가 같은 처지였다면 억울함과 분노로 삶이 무너졌을 것 같은데, 그는 해마다 그 자리를 찾아오고 또 밭으로 나갑니다. 그 모습이 단순히 '불쌍한 소수민족'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는 사람의 존엄으로 보였습니다.
카프카스의 소수민족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 안에서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다게스탄의 헌법 제정 기념 축제에 38개 종족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춤과 의상을 나누는 모습은, 공존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지역 소수민족들이 선택한 방식입니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이 결국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지역의 이야기를 한 번쯤 더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강대국의 논리가 아닌, 소수민족 당사자들의 시선에서 역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달라진 시선이, 우리 주변의 소수자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