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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처음 그것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화산재 속에 굳어진 사람들의 석고 형상. 그냥 오래된 유물이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사람은 아이를 두 팔로 끌어안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도망치다 멈춘 자세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역사가 갑자기 책 밖으로 튀어나온 느낌이었습니다.

화산이 멈춘 순간, 석고캐스트로 되살아나다
폼페이가 발굴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었습니다. 우물을 파던 농부가 지하 4m 깊이에서 뭔가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일입니다. 그러나 초기 발굴은 보물을 찾는 수준에 불과했고,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1860년 이후 주세페 피오렐리 교수가 작업을 주도하면서부터입니다.
피오렐리가 마주한 가장 큰 미스터리는, 도시 전체가 그대로 봉인되어 있는데 정작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식탁 위에 그릇이 그대로 놓여 있는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굳어진 화산재 사이에 불규칙하게 남아 있던 빈 공간들이었습니다. 그 공간에 석고 반죽을 채워 넣고 굳힌 뒤 주변을 긁어냈을 때, 폼페이 최후의 날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석고캐스트(Plaster Cast)입니다. 석고캐스트란 화산재가 시신을 감싼 채 굳어지고, 시간이 지나 내부의 살이 썩어 생긴 공동(空洞)에 석고를 부어 형태를 복원하는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 그대로 틀로 남은 것을 복원해 낸 방식입니다. 뜨거운 열기를 피하려 입과 코를 막고 앉은 채 숨진 마부, 뱃속 아이를 지키려 엎드린 임산부, 서로 손을 맞잡고 달아나다 멈춘 연인. 제가 직접 그 형상들 앞에 섰을 때, 이건 유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폼페이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석고캐스트는 2천여 구에 달합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된 화쇄류(Pyroclastic Flow)가 도시를 덮친 것입니다. 화쇄류란 고온의 화산가스, 화산재, 암석 파편이 뒤섞여 시속 160km에 달하는 속도로 쏟아져 내리는 현상입니다. 허리케인에 맞먹는 속도였고, 도시는 하룻밤 사이에 4m 두께의 화산재에 완전히 묻혔습니다.
2천 년 전 도시 구조, 지금과 얼마나 다를까
폼페이를 둘러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게 정말 2천 년 전 도시 맞아?" 격자형으로 구획된 도로, 보행자용 인도, 심지어 횡단보도 역할을 하는 디딤돌까지. 마차가 지나가다 속도를 줄이도록 설치된 돌 사이에 아직도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발굴된 상점만 400여 개에 달하고, 화덕이 즐비한 패스트푸드점, 빵집, 세탁소가 실제로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세탁소 앞에 오줌 항아리를 놓아둔 이유가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소변 속 암모니아를 세제로 활용했고, 행인들이 항아리에 볼일을 보면 세탁소에서 그것을 가져다 썼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황당했는데,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원을 재활용하는 꽤 실용적인 방식이었습니다.
폼페이의 도시 인프라 중 제가 특히 인상 깊게 본 것은 급수 시스템이었습니다. 도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급수 탱크(Castellum Aquae)에서 물을 세 방향으로 분배했습니다. 여기서 카스텔룸 아쿠아에란 로마 수도망에서 고지대에 설치된 배수 분배 시설로, 수압을 조절하며 공공 수도, 공중 목욕탕, 개인 주택으로 물을 나누는 역할을 했습니다. 가뭄이 들면 개인 수도를 먼저 끊고, 그다음 목욕탕, 하지만 시민을 위한 공공 수도는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 원칙이 2천 년 전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습니다.
폼페이 도시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격자형 도시 설계: 중앙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바둑판 구획
- 포럼(Forum): 광장을 중심으로 신전, 법원, 행정기관이 집중 배치
- 공중 목욕탕(Thermae): 식당, 체육관, 휴게실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
- 급수 인프라: 수도교(Aqueduct)를 통해 원거리 수원지에서 물을 도심까지 공급
문명이 무너지는 방식, 자연이냐 전쟁이냐
폼페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하게 남은 감정은 웅장함이 아니라 취약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인더스 문명과 바빌론을 보면서 더 깊어졌습니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2500년경 이미 격자형 도시 설계, 하수 시스템, 공중목욕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발굴 면적만 2.5평방 킬로미터에 달하고, 인구는 20만 명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700여 개의 우물, 정교한 배수로, 하수관이 도시 바깥까지 연결된 구조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공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1800년경, 이 문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무기도 없고, 파괴의 흔적도 없습니다.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몬순(Monsoon)의 약화입니다. 몬순이란 계절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계절풍으로, 인도 아대륙에 주기적으로 강우를 가져다주는 핵심 기후 요소입니다. 몬순이 약해지자 가하하라 강 등 주요 수원(水源)이 말라버렸고, 물 공급이 끊긴 도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출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모헨조다로).
바빌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기원전 605년에 재건한 바빌론은 당시 세계 최대 도시였습니다. 성벽 높이 14m, 3중 성벽 구조, 총 길이 수십 킬로미터의 방어선, 도시 내부를 관통하는 유프라테스강 지류를 활용한 해자(Moat) 시스템까지 갖추었습니다. 해자란 성벽 외곽을 따라 파낸 물길로, 적의 접근을 막는 방어 기능을 합니다. 물이 귀한 사막 위에 폭 10m, 깊이 3m의 해자를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철옹성도 결국 무너졌습니다. 자연재해와 정치적 혼란, 외부 침략이 겹쳤을 때, 아무리 정교한 문명도 버티지 못했습니다.
문명의 위대함과 취약함, 동시에 읽기
고대 문명을 다룬 이야기들을 보다 보면 종종 낭만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려한 프레스코화, 웅장한 지구라트, 정교한 수도 시스템. 그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폼페이 부자들은 연회에서 계속 먹기 위해 깃털로 목을 간지럽혀 음식을 토해내는 방식을 활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추게 됩니다. 이걸 문명의 여유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극단적인 낭비로 봐야 할까요. 그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 뒤에는 노예 노동이 있었고, 공공 수도를 만들었지만 개인 수도는 돈을 내야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빈부격차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확인된 폼페이의 사회구조를 보면, 로마 시대 도시 노예 비율은 전체 인구의 20~30%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Roman Slavery). 맷돌을 손으로 돌리던 노예, 화덕을 관리하던 노예 없이는 그 화려한 빵집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대 문명을 볼 때 두 가지를 동시에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당시 기술력과 도시 설계의 혁신성: 인류가 얼마나 일찍부터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 그 시스템 뒤에 숨겨진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 욕망의 민낯
문명은 발전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결국 폼페이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장면은 연인이 손을 맞잡은 석고캐스트였습니다. 도시 시스템도, 화려한 벽화도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서로를 향해 손을 뻗은 두 사람. 역사를 통해 문명의 위대함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 위대함이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하루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보내는 이 일상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박물관을 나오면서도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